1914-1945: 시작
하우스의 토대
피에르 발망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가 해방 된 직후, 자신의 이름을 건 패션 하우스를 세웠기 때문에 초창기의 그의 삶은 혼란과 비극, 20세기 초 유럽의 궁극적인 재탄생과 서로 얽혀있습니다.
초창기 시절
아름답고 외딴 프랑스 사보이 지방의 작은 알프스 마을인 생 장 드 모리엔느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피에르 발망은 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1933년 파리로 이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학업을 뒤로하고 패션계로 가는 길을 전력으로 찾기 시작했습니다.
몰리뉴(MOLYNEUX)와의 작업
피에르 발망의 첫 번째 패션 작업은 그레타 가르보(Greta Garbo), 마를레네 디트리히(Marlene Dietrich), 비비안 리(Vivien Leigh)를 비롯한 당대의 주요 스타들의 의상을 디자인하며 성공의 절정을 달리고 있던 대담한 영국 디자이너 에드워드 몰리뉴(Edward Molyneux) 밑에서 이루워졌습니다. 발망이 설명하듯이 그가 몰리뉴에게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불필요한" 것으로 보일 수 있는 것들은 모두 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몰리뉴는 젊은 디자이너에게 구조와 단순성이 지닌 중요성을 교육시켰습니다. 발망은 어떻게 모든 것을 다시 본질로 되돌리는지를 스승으로부터 배웠습니다. 꾸뛰르에서 몰리뉴는 아름다우면서도 복잡하지 않은 드레스를 디자인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초창기 시절
1939년 나치 침공 이후, 발망은 프랑스군에 소집되어 고국인 사보이로 돌아가 알파인 방어군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프랑스가 함락된 후 독일로 파견된 발망은 나치의 전쟁 기계가 되거나 강제 노동을 했던 그 또래의 다른 많은 프랑스 청년들처럼 되는 운명을 운좋게 피할 수 있었습니다. 대신 그는 파리에서 가장 성공적인 쿠튀르 하우스 중 하나를 감독했던 루시앙 를롱에서 일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루시앙 를롱(LUCIEN LELONG)
루시앙 를롱(LUCIEN LELONG)은 프랑스 패션 산업의 규범을 정하는 강력한 무역 협의회의 수장이었습니다. 나치는 파리의 패션 및 섬유 공장을 독일로 이전하려고 했고 그로인해 이미 상당한 고통을 겪고 있는 프랑스에는 수천 명의 실업자가 더해질것이 분명했기에 를롱은 이러한 나치의 계획을 저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를롱에서의 작업
전시에 피어난 특별한 우정
유명인 클라이언트
포토 크레딧:
피에르 발망의 모든 사진
© Balmain Archives Balmain,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지합니다에드워드 몰리뉴
제임스 아베 사진(1922) 위키미디어 공용
루시앙 를롱(1925)
위키미디어 공용루시앙 를롱 퍼퓸 (1924)
Nationaal Archief, 위키미디어 공용
파블로 피카소의 거트루드 스타인 초상화
위키미디어 공용빌리낭에 있는 거트루드 스타인의 집
위키미디어 공용
프랑수아 프리미에가
하우스의 토대